'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2597건

  1. 2017.09.28 남양주, 구리시의 자랑스러운 인물

이강덕


구리면 아천리 출생 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3월 전국에서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항의하여 3.1만세시위가 전개되자, 3월28일 오후 5시 같은 마을에 사는 심점봉과 함께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아천리 .토평리. 소문리 일대에서 시위를 한 후, 다음날인 29일에도 아차산에서 만세시의를 벌였다.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얼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판결을 받고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김규식

구지면 사노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호는 노은(蘆隱)으로 한말에는 의병활동을, 합병후에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한말 대한제국군인 육군 참위(參尉)로 군대에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당하자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08년 1월에는 13도연합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밀려 1908년 1월 13도 연합의병군의 서울진격작전 당시 부상을 당한 적도 있다. 이후에도 경기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포로가 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1910년 합병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북만주의 항일무장독립 운동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단장이 되어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만주 왕청현 십리평에 세운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김좌진등과 함께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 2연대 제 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밀산(密山)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의 군대가 통합하여 편성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총사령이 되어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었다. 자유시참변 후에 다시 연길현으로 돌아와서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해노병회(上海勞兵會)의 지원을 받아, 1923년 5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출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제도를 실시하여 직접 농사를 지어 군수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소련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력을 강화하고 군사훈련을 계속하였다. 1925년에는 북구영안현(北溝寧安縣)에서 정의부와 참의부가 합쳐 조직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고 1926년 4월 5일 길림성 영남(領南)호텔에서 각계의 혁신적인 대표들이 모여 조직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항일 투쟁을 계속할수록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2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 하여 연수현(延壽縣)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학교 운영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31년 4월 10일 주하현(珠河縣)으로 가서 최악. 홍진. 신숙등을 만난 후 암살당하고 말았다. 1963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Posted by 말총머리
,